두 개의 질문


질문 : 저희의 삶은 저희 각자의 세계에 빠져 있다고 느껴집니다. ‘빠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답 : 굴렁쇠가 굴러가고 있습니다. 그 굴렁쇠가 땅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계속 구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굴렁쇠가 스스로 땅 위에 서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면, 땅에 머무르고자 고집한다면, 그 때 굴렁쇠는 자빠지게 됩니다. 땅에 주저앉게 됩니다.

빠져 있음은, 이와 같이 땅을 인식했을 때, 상응하고 있는 대상에 머무르려고 할 때, 거기에 자신을 잃는 것과 똑같은 현상입니다.

간단하게 감각적인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꼬집으면 아픕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감각으로서의 아픔, 그것은 하나의 순수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순수한 아픔만을 겪지 못합니다. 거기에 전에 겪었던 아픔의 기억,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생각, 그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 여러 가지가 섞여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런 많은 것과 함께 아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혼란을 수반하고 있으며, 일종의 정신분열을 일으킵니다. 당신은 아픔이 아니라, 아프다는 두려움 속에 있게 됩니다. 아프다는 생각이 전신의 감각을 아프다는 쪽으로 이끌고 갑니다. 바로 그 때, 뜨거운 커피포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주의력을 잃습니다.

장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장자는 활을 메고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는 이미 10 년 이상 활을 다루어 왔기에, 목표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쏘아 맞출 수가 있습니다.

그는 숲속에서,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를 향해 활을 겨누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는 겨냥을 당하는 순간 자신의 위험을 알고 날아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동물에게도 생각의 파장은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날아오르는 그 순간은 불안정하게 마련이고, 그 때 화살이 날아가 새를 맞추는 것이 활 사냥의 정석입니다.

그런데 장자의 염력권 안에 이미 새가 들어왔는데도 새는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쌍안경을 꺼내어 그 새를 자세히 관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새도 지금 무엇인가를 열심히 겨누고 있었습니다. 자기 눈앞에 있는, 매미인지 거미인지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새는 장자가 쌍안경을 쓰고 자기를 보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금 전에 활을 겨누고 있었던 자기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때, 장자의 머리 속에 강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장자는 메고 가던 활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여러분은 사소한 걱정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사소한 걱정은 다른 수많은 걱정을 연상적으로 끌어 모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두려워하는 자신의 마음과 갈등을 일으키게 합니다. 갈등하는 마음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태연함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태연하기 위해서 태연함을 겉꾸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태연함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마음속에는 강박관념이라는 것이 있으며, 그러한 관념에 빠지게 되면, 마치 전자 제품이 합선을 일으키는 것 같은 상태를 일으키게 됩니다. 합선을 일으킨 상태는 대단히 불안한 상태이기에 우리는 그 불안함을 몹시 두려워하게 됩니다. 즉, 합선을 일으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합선 속에 빠져 버리게 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다른 여러 가지 기능이 마비되어 버립니다. 정신적으로는 정신분열이, 육체적으로는 신경마비와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보면, 물질이나 사람의 마음이나 그 법칙은 똑같습니다.

질문 : 그렇다면 자신의 세계에 빠지지 않고 그림자를 벗어나서 본체의 세계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 그것뿐입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었더라면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분은 본체의 세계를 목적지로 삼고 있습니다. 문제를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해야 할 어떤 것도 없으면 됩니다. 갈등이 지나갈 때까지 갈등을 지켜보십시오. 그렇게 깨어 있게 되면, 그런 혼란은 점점 엷어지고, 당신은 좀 더 자기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다른 많은 사람을 위해서 더욱 상세히 대답해 보려 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수행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선(禪)이라든가 요가라든가, 수많은 명상의 방법과 기도의 방법, 이들 방법에 대해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입장을 갖지 말고 생각하고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이들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각을 집중해 태워 버리는 방법이며, 또 하나는, 생각을 방심 상태에서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생각의 간격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물론 두 가지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목적이 되어 그 수행 방법을 붙잡고 매달리면서 빠져 버리면, 생각의 간격을 찾아내는 데 에너지가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터득하는 데 에너지가 쓰이게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 에고가 사라지는 쪽이 아니라, 에고가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아무튼 이 수행 방법들은 하나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켜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일어나는 내면의 변화를 일단은 열심히 지켜봐야 합니다. 열심히 지켜보다 보면, 열심히 지켜보는 그것도 없어지게 됩니다.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켜보는 나도 없는 거기에 또 다시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나’가 아니라 신적인 존재, 즉 푸루샤(purusha)가 맑게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그것은 지켜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 그것이 지켜보는 것이로구나’ 하고 이해하는 것은 지켜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하고 있는 자신을 맑게 바라보는 것이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 주시자를 쉽게 잃어 버립니다. 잠을 잘 때는 같이 잠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뚜렷해지면, 잠 속에서도 그 주시자는 깨어 있게 됩니다. “깨어 있으라!” 예수가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에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그런 뜻입니다.

내일 당장 집안에 큰일이 닥친다거나, 가장 원수 같은 사람이 칼을 들고 닥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지금 편안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지금 그 마음이 편안하게 되면, 여러분의 잠재의식이 편안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편안함 속에서, 곤란한 문제들은 저절로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편안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세계가 곧 평안하게 될 것입니다. 편안한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편안해지면 여러분의 세계가 곧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나는 편안한 세계에서 살아야지” 하고 말하는 졸장부가 되지 말고, “내가 곧 세상을 편안케 하리라”고 말하는 대장부가 되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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